숨 막히는 폭염이 도시를 집어삼키는 동안, 시간의 흐름을 잊은 듯 먼저 가을을 맞이한 곳이 있다. 아스팔트 위에서 35도를 넘나드는 열기가 기승을 부릴 때, 이곳 숲속은 마치 다른 세상처럼 25도 안팎의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에어컨조차 필요 없는 식당에서는 문틈으로 오가는 청량한 바람이 최고의 냉방 장치가 된다. 이곳은 바로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의 품에 안긴 천년고찰 해인사다.

 

해인사로의 여정은 주차장에서부터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발밑에서 느껴지는 울퉁불퉁한 감촉에 고개를 숙이면 땅바닥을 가득 메운 도토리의 향연이 펼쳐진다. 아직 여름의 끝자락이지만, 숲은 이미 가을을 준비하며 풍요로운 선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른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러 온 사람들의 얼굴에는 도시의 찜통더위에서 벗어난 해방감과 설렘이 가득하다. 일주문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는 가족, 가벼운 등산복 차림으로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중년 부부의 모습에서 평화로움이 묻어난다.

 

아직 푸른 잎이 무성한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마저 따스하게 느껴질 뿐 덥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살랑이며 온몸을 간질이는 숲의 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면, 길 한쪽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고사목 한 그루와 마주하게 된다. 무려 1200년, 해인사의 창건과 그 역사를 함께한 이 나무는 80년 전 생을 다했지만, 여전히 사찰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굳건히 서서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고요한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고개를 들면 '해인총림' 현판이 걸린 봉황문이 위용을 드러낸다. 늦가을이면 이곳은 불타는 듯한 단풍으로 물들어 잊지 못할 '인생 사진'을 남기는 명소로 변하지만, 녹음이 짙은 지금도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봉황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심장 모양의 노란 종이가 주렁주렁 매달린 '소원나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야산의 산신이 깃들어 가장 영험한 장소로 알려진 이곳에는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올 시즌 프로야구 돌풍의 주역을 응원하는 "한화, 우승하게 해주세요"라는 재치 있는 소원부터, "의대 합격 바랍니다"라는 현실적인 다짐, 그리고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한 "우리 가족 건강하고 행복하게"라는 소박하지만 가장 위대한 바람까지. 각양각색의 소원들이 모여 나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었다.

 

구광루와 대적광전을 지나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장경판전에 다다른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올해로 30주년을 맞는 이곳은, 부끄럽게도 유럽의 수많은 세계유산을 둘러보면서도 정작 한 번도 찾아보지 못했던 우리 것의 위대함을 확인하는 장소다.

 

한눈에 보기에도 장경판전의 모습은 독특하다. 특히 위아래 크기가 다른 수많은 환기창으로 덮인 외벽은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현대 건축 기술로도 재현하기 어렵다는 정교한 환기와 습도 조절의 과학.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을 계산하고, 자연의 원리를 이용해 8만 장이 넘는 목판을 천년 가까이 완벽하게 보존해 온 우리 조상들의 지혜는 경이로움 그 자체다. 고대 로마인이 수로를 만들며 터득한 지혜에 비견될 만한, 아니 그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이 단순해 보이는 건물 안에 숨 쉬고 있었다.

 

해인사에서의 감동을 이어가기 위해 인근 대장경테마파크로 향했다. 이곳은 팔만대장경의 역사와 기록문화를 미디어아트와 체험형 전시로 재미있게 풀어낸 공간이다. 특히 팔만대장경을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기는 '이운(移運)' 과정을 사계절에 빗대어 표현한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는 빛과 소리, 움직임으로 관람객을 압도한다.

 

관람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뜻밖의 전시물이 발길을 멈추게 했다. 대장경 시설 한편에 전시된 공군 전투기 F-86F. 의아함도 잠시, 그 뒤에 숨겨진 가슴 뭉클한 사연을 알게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김영환 장군은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자신의 손으로 파괴할 수 없다는 양심에 따라 그 명령을 거부했다. 그의 숭고한 결단 덕분에 팔만대장경과 해인사는 전화(戰火)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파리 파괴 명령을 거부한 콜티츠 장군의 일화와 함께, 시대를 초월하여 빛나는 인간의 양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로 남아있다.